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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사·여행기
작성자 손상태
작성일 2020-04-30 (목) 08:28
홈페이지 http://blog.daum.net/sonsang4
ㆍ추천: 0  ㆍ조회: 97      
IP: 121.xxx.148
[부처님 오신날]왕오천축국전 -혜초의 길을 가다


<왕오천축국전 -혜초의 길을 가다>
◈KBS 역사스페셜 – 해동의 첫 번째 세계인, 혜초◈
 
Click  ▼

https://youtu.be/J8H2Kt6ae9s





혜초 ( 704~787 )

 신라인인 혜초는 일찍 당으로 건너가 광저우에서 남인도 출신의 승려 금강지로부터 밀교를 배우고, 그의 권유로 722년경 바닷길을 타고 인도로 건너갔다. 인도의 여러 곳을 둘러본 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727년에 당으로 돌아왔다.
 그가 저술한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폴 페리오가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한 둔황 문서 속에 들어있었다. 책의 앞뒤가 떨어져 나가 누구의 저술인지 알지 못하였으나, 페리오의 연구로 혜초의 저술임이 밝혀졌다. 당시 인도의 풍습이나 불교와 관련된 상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이븐바투타의 "여행기"등과 더불어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힌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 한 사내가 길을 나섰다.
그는 해동의 작은 나라 신라의 대덕고승 ‘혜초’다.
마르코 폴로보다 500년 앞선 8세기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그가 남긴 6천여 자 속에 숨은 미스터리를 밝혀본다.

- 8세기 기록을 따라가는 21세기 영상기록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천축국’ 순례에 나선 승려가 있다
.


천축국은 지금의 인도를 말한다. 그렇다면 옛날에 길을 나선 순례자들은 어떻게 여행을 했을까? 혹시, 그 시절에도 천축국 여행을 위한 안내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총 227행, 6천여 자로 기록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당시 구법 여행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렇다면 21세기에도 이 책을 따라가는 여행이 가능할까?
취재진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과 함께 왕오천축국전에 최초로 등장하는 나라 구시나국(현 비하르주 쿠시나가르)부터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을 한 사르나트(바라나시 북쪽)에 이르기까지 혜초의 순례 기록을 좇아 그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 8세기 혜초 순례 루트의 재발견


8세기, 해동의 신라인들이 이해하는‘세계의 끝’은 과연 어디였을까?
‘떠날 때는 100명이나 돌아오는 이는 하나도 없다’는 멀고도 험난한 인도 구법 여행의 길을 나선 혜초. 중국 광주에서 배를 타고 동천축에 도착해 석가모니의 성지를 찾아 순례한 혜초는 오천축국 (동천축,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을 넘어 머나먼 여정을 이어갔다. 하지만 정작 오천축국에 대한 기록은 루트의 3분의 1에 불과하고, 서역 지방에 대한 기록이 더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 혜초 순례 루트의 특징이다. 그는 왜 불교 국가를 넘어 힌두교, 이슬람교 등이 성행하는 나라까지 찾아갔을까?


- 한반도 첫 세계인, 혜초


자신이 직접 경험한 기록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가 섞여 이루어지는 여행기. 혜초는 직접 밟아본 ‘답사지’와 얻어들은 이야기로만 쓴 ‘미답사지’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지리적 위치를 정확하게 나타냈다.
게다가 혜초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아랍을 대식국(大寔國)으로 표기하는 기록을 남겼다. 1,300여 년 전, 문명과 사상, 그리고 종교의 경계를 넘어 콜럼버스보다도 먼저 세계의 구석구석을 누볐던 혜초는 한반도 최초의 세계인이었다.


-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유일한 기록 왕오천축국전


1,300년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시아 문명탐사를 가능케 하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인 펠리오에 의해 중국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 놀라운 기록의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고작 100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13세기 후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14세기 초반 오도리크의 ‘동유기’ 그리고 14세기 중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더불어 세계 4대 여행기로 손꼽힌다. 왕오천축국전은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 인도인들에겐 8세기 인도의 모습을 일러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록이자, 그 당시 중앙아시아, 서역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기록이다.


- 혜초는 왜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한국 역사에서 사라졌던 인물 혜초. 하지만 그는 중국의 밀교 고승인 불공의 수많은 제자들 중에 ‘6대 제자’로 여겨질 만큼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인물이다. 혜초는 고국 신라를 떠나 30대에 인도와 서역 탐방을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온 후, 80여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나라에서 밀교 경전 연구에 전념했을 뿐, 결국 신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왜 고국 신라가 아닌 중국 불교의 성지, 오대산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을까? 취재진은 혜초가 입적한 곳으로 알려진 ‘건원보리사’를 찾아 알려지지 않은 혜초 생애의 미스터리를 추적해보았다.

신역사스페셜 34회 – 해동의 첫 번째 세계인 혜초 (2010.5.1.방송)
http://history.kbs.co.kr/




●혜초(慧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대 고대/남북국 

-출생 704년(성덕왕 3) 

-사망 787년(원성왕 3) 

-대표작 왕오천축국전 


밀교(密敎)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였다. 719년(성덕왕 18) 중국의 광주(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금강지는 남인도 출신으로 제자인 불공(不空)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서 밀교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금강지는 당시 장안(長安)·낙양(洛陽) 등지에서 밀교를 가르쳤는데, 이 때 혜초가 그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혜초가 인도구법을 결심한 것도 스승의 권유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구법여행을 떠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723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로 가는 여행도 해로였는지 육로였는지 불분명하다. 그는 만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하였고, 카슈미르(Kashmir)·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하였다.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였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도량을 열고 스승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이라는 밀교경전을 연구하였다.


이 때 금강지는 이 경전의 한역(漢譯)을 시작하였는데, 혜초는 필수(筆受)를 맡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에 금강지가 죽었으므로 이 사업은 중단되었고,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다시 인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금강지가 죽은 이후 혜초는 금강지의 제자였던 불공삼장으로부터 다시 이 경전의 강의를 받고, 774년 가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다시 역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불공은 이보다 수개월 전인 6월에 죽었기 때문에 이 연대에는 다소간의 문제가 있다.


오늘날 불교학계에서는 혜초와 불공의 경전번역을 1년 앞당겨서 단정하고 있다. 이 때 그는 불공의 6대제자 가운데 제2인자로 유촉(遺囑)을 받았다. 또, 그에 관해서는 ‘신라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 밀교의 법맥을 금강지―불공―혜초로 손꼽을 수 있다. 불공이 죽은 직후 동문·제자들과 함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그 내용은 스승의 장례에 대하여 황제가 베풀어준 하사(下賜)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또 스승이 세웠던 이 사찰을 존속시켜 달라는 청원이었다. 그 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러 있다가 780년 불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오대산은 불공이 오래 머무르던 곳이며, 첫번째 제자인 함광(含光)도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노년을 오대산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보내면서, 전에 필수를 맡았던 ≪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하였다. 그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787년에 입적하였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신라로 귀국한 흔적은 없다. 이미 신라에는 명랑(明朗)을 중심으로 하는 신인종(神印宗)이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혜초가 공부한 것은 그와는 별도의 밀교였던 것으로 보이며, 불공과의 관련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정통밀교를 표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중국 유학승들이 인도에 간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나란다(Nálanda)라는 불교대학에서 수학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 나란다에서 공부한 흔적도 없다.

따라서, 단순히 불적지(佛蹟地)를 참배하고 밀교를 공부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에 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밀교와 신라의 밀교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는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며, 그에 관한 기록이나 저술에서 언제나 ‘신라인’임이 강조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고국과 관련을 맺었으리라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출처>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63646



●혜초(慧超)-다음백과 


<요약>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지었다. 700년을 전후하여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중국 광저우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에게 밀교를 배웠다. 그후 금강지의 권유로 구법여행에 나서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773년경 대흥선사에서 금강지의 제자 불공으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불공은 유서에서 자신의 법을 이은 6대 제자 가운데 2번째로 혜초를 꼽았다. 이후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로 귀국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성덕왕(또는 경덕왕) 때의 고승으로, 787년에 중국의 오대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입적하였다.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지었다. 700년을 전후하여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밀교를 배웠다.


그후 금강지의 권유로 구법여행에 나서 인도의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 아시아 일대까지 답사했다. 그가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30세 전후로 추정된다. 733년 장안의 천복사(薦福寺)에서 금강지와 함께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을 연구했다. 740년 1월 금강지가 이 경을 번역할 때 필수를 맡았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금강지가 죽어 이 사업은 중단되었으며,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742년 다시 인도로 보내졌다.


그후 773년경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금강지의 제자 불공으로부터 이 경의 강의를 들었다. 불공은 유서에서 자신의 법을 이은 6대 제자 가운데 2번째로 혜초를 꼽았다. 불공이 죽은 후 동료들과 함께 황제에게 글을 올려, 스승의 장례 때 보여준 은혜에 감사하며 아울러 스승이 세웠던 사찰을 존속시켜달라고 청원했다. 그뒤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다가, 780년 불공이 활동했던 오대산으로 갔다. 그뒤 건원보리사에 머물면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한역과 한자음사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했다.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로 귀국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오천축국전〉 3권 가운데 일부와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서 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序〉 및 〈하옥녀담기우표 賀玉女潭祈雨表〉가 전한다.→ 왕오천축국전


<출처>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5h1191a


<참고>


●밀교(密敎)-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20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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